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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기 143

새 권력의 시대

각 당의 대선 후보가 결정났다. 지난 총선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무엇을 기준 삼아 한 표를 행사해야 할지. 선거는 최악을 피하는 최선의 수를 찾는 제도. 코로나19를 겪어서일까 이번만큼은 예기치 않은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는 이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무엇보다 이 책을 보니 산업구조의 변화를 빠르게 감지할 수 있는 리더가 절실하다고 생각된다. 각 후보들이 제시한 경제, 산업 정책을 투표의 척도로 삼으려한다. 독일에선 메르켈 시대가 끝이 났다. 제 발로 임기를 마친 첫 총리. 놀라운 것은 70%대의 지지율을 여전히 기록하고 있다는 점. 정치적으로 장수한 이가 높은 신뢰도를 유지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삶의 정점에서 야인의 길로 들어서는 결단력은 한번 더 그를 우러러보게 한다.

단편기 2021.11.06

사랑해 마지 않는

4주간의 저녁 강의. 마지막 주 배운 라따뚜이는 프랑스식이긴 하지만. 파스타 가지수만 해도 5개. 그동안의 노트 - 알리오올리오는 파스타가 아니라 모든 오일 파스타의 베이스 - 한국은 비싼 오일의 가치를 모르는 시장. 백화점에서도 20만원이 넘는 올리브오일을 재고털이식으로 3만원에 살 수 있음 - 감바스 파스타 할때 새우 머리를 잘 쓸 것 - 허브 없는 파스타는 없다 - 바질, 토마토, 모짜렐라만 들어간 나폴리탄은 봉골레 뺨침 - 시판소스는 금물. 홀토마토를 쓸 것. 소분해서 얼려두기. - 채소 카라멜라이즈 할 땐 물을 잘 쓸 것. 가지는 제외. 물없이 카라멜라이즈 할 땐 양파 급의 맛을 낼 수 있음 - 면수의 중요성☆☆☆☆☆ - 면은 소스보다 나중에 ☆☆☆☆☆ - 이탈리아 제품을 살 때 팁, 감베로 로..

단편기 2021.04.28

환기 중

지난번 퇴짜 맞은 미술관을 이주만에 다시 찾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꼭 가보라고 추천해주고 싶은 곳. 작품이 주는 에너지만큼 작가의 여생은 굴곡졌다. 여전히 글 쓰기는 싫다. 주절주절 해볼 말은 많은데 수다를 끌어 낼 여분의 에너지가 없다. 하루 하루 방전. 여전히 미술관은 간다. 정신 속에 뭘 좀 넣고 싶다는 갈증을 느낀다. 좋은 경과인 것 같다. 당분간 이렇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간헐적으로 쓰고, 꾸준히 운동하고, 조용히 읽는... 그 정도의 일들. 그렇지 않으면 둔한 내가 당신을 모르고 말 것 같아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간은 뭉텅뭉텅 지나왔다.

단편기 2021.04.07

반성문

글을 못썼다. 매일 하나씩 쓰기로 했던 글감들을 꽤 많이 놓쳤다. 어쩔 수 없었다. 생에 가장 극적인 순간을 걷고 있어서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수많은 변화 속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적합한 판단을 내려야 했던 시간들. 이 압박감을 어떻게, 얼마나 견뎌내는지 나는 내 자신을 시험해보고 있었다. 가능하면 즐기려 했다. 고통스러웠지만 한 고비 넘길 때마다 즐거웠다. 하지만 매번 의연하지 못했다. 감정에 흔들리는 상황도 결국 나왔다. 나는 누군가에게 화를 냈고, 또 누군가에게 그 화풀이를 했다. 위기 상황이 오면 불필요하게 예민하고 날카로워지는, 개차반 같은 성격. 다스리지 못했다. 모든 일정이 끝난다. 길고 긴 터널을 거쳐 이제야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결국 터져버린 너를 보고. 나는 미안함에 몸둘 바를 모르..

단편기 2021.02.10

새벽에 어딘가가 너무 아파서 깼다. 토할 것 같았다. 창문을 다 열고 차가운 새벽공기를 채웠다. 따뜻한 장판에서 온기를 유지했다. 잠들지 못했다. 한시간동안 호흡만 했다. 밀려드는 생각들을 떨치기 힘들었다. 일어났더니 위까지 아프다. 이사할 집을 보고 왔는데 다행히 상태가 좋았다. 전날 유명 브랜드의 그릇을 사준 엄마는 오늘에서야 기분이 이상했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들을수록 위가 더 아파 온다.

단편기 2021.01.04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매일 살얼음판 위를 걷다보니 경계의 벽이 높아지고 마음의 총량도 작아지는 것 같다. 한편으론 나의 안위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가 나를 사랑하건 말건 중요하지 않다. 그를 위하는 마음, 그가 몰라도 상관없다. 내 생명줄 간신히 부여잡는 와중에도 누군가를 떠올린다는 것은 기적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코로나는 사람들을 향한 진심을 확인하는 아주 분명한 계기가 됐다. 반대로 내가 사랑하건 말건 상관없이 나를 걱정해주고 사랑해 준 사람들에게 무한히 감사하다. 누구에게 내 인생을 바쳐 온 마음을 다해야 할지 나는 지난 수개월동안 분명히 알게 됐다. 가능하면 알아차릴 수 있게 대놓고 생색내어 주세요. 그래야 오래도록 갚아요. 겨우내 굶을 까치를 걱정해 열매를 남겨놓은 사람의 마음으로 20..

단편기 2021.01.03

2021년 첫 책은

올해의 운세를 확인한 기분이다. 사놓고 못 본 책들을 쭉 훑었는데 가 손에 착 하고 붙었다. 이슬아 작가의 찰진 추천사만 보고 뭔 내용인지도 모르고 산 책이었다.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파동이 커질 웨이브가 무엇인지 힌트를 얻은 기분이다. 나의 운세도 이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을 타고 갈테니 말이다.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집하는 전범선. 매일같이 기록을 갈아치우며 전성기를 누리는 자본주의 시대에 희미해지는 것을 구해낸다. 그가 '계승자'로서 공동인수한 독립서점 풀무질도, 해방촌 비건 식당 소식(여긴 내 워너고 리스트에 있는데 그의 사업체인지 몰랐다. 아직 못가봤다)도, 동물해방물결도 그가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들을 대표한다. 허무맹랑한 주장으로 치부된 이야기들. 하지만 동물권을 보호하는 동물당을 창당하려 ..

단편기 2021.01.02

과잉대표

https://youtu.be/4A8qJ70jSmg 학부 수업 때 논문을 읽고 의미있는 분석을 공유하는 시간이 있었다. 내가 선택한 논문은 인터넷 댓글을 여론으로 볼 수 있냐는 연구로 스브스의 오늘자 보도와 거의 똑같은 내용이다. 스브스의 분석의 양은 더 방대하지만 걸과적으로 도출해낸 결론은 그때의 논문과 같았다. 논문에서는 댓글을 쓰는 적극적인 누리꾼과 댓글을 쓰지 않고 읽기만하는 소극적 누리꾼으로 나눴던 것 같다. 그런데 비율이 충격적이었다. 기사를 보는 사람 중 댓글을 쓰는 사람은 1%도 못미치는 극소수라는 것이다. 나머지는 그 1%의 댓글을 보며 그것이 다수의 의견으로 인식한다는 주장이었다. 2017년부터 최근까지의 빅데이터를 분석한 sbs 보도도 비슷한 결론을 냈다. 그 사이 댓글을 쓰는 액티브..

단편기 2020.12.30

F코드

F코드가 뭐에요? 정신과 질병 전용 코드에요. 같이 스터디를 했던 언니이자 기자 선배인 하늬 언니가 책을 썼다. 책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여러번 들어 본 질문일텐데 언니는 웃으며 친절히 말해주었다. 일하면서 한동한 소식이 끊겼고, 워낙 밝고 쾌활한 사람이라 우울증으로 고생했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선후배로서, 또 직장인으로서, 또래로서 책을 펼치지 않아도 어떤 지점이 괴로울지 알 것도 같았다. 그렇게 간절했던 일을 결국 하게 됐지만 어려운 일은 한 둘이 아니었다. 매 순간이 압박 그 자체다. 즐겁고 기쁜 일도 많지만 자존감이 깎이고 무기력해지는 순간도 찾아온다. 번아웃이라고도 에둘러 말하는데 나는 이 의욕 없는 감정이 우울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

단편기 2020.12.29

좋은 시민?

좋은 시민, 분명 좋은 말인데 눈에 걸린다. 좋다는 게 성립하려면 그 뒤엔 나쁜 시민이라는 개념도 존재해야 한다. 이분법적인 단어 때문에 글자를 읽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좋은 시민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을 나쁜 시민으로 의식하게 된다. 코로나19 시대의 좋은 시민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방역 수칙을 잘 지키고 노력한 사람들, 자신을 비롯해 타인이 감염병에 걸리지 않도록 행동반경을 최소화한 사람들이다. 칭찬 받아야 마땅하다. 나쁜 시민은 그렇다면 무엇인가. 좋은 시민에 속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이다. 방역 수칙을 지키지 않고 타인에게 민폐를 끼친 사람들이다. 정부 지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다. 정부를 믿지 않거나 정부의 잘못된 판단을 지적하는 사람들이다. 결국 좋은 시민 이라는 단어는 말을 안 듣는 것은 나쁜..

단편기 2020.12.26

디즈니 심폐소생기

국내 기업의 경영 문화에 새 바람이 불고 있다. 특히 거수기 역할만 하는 국내 기업의 이사회는 지난 5년간 국내외 행동주의 펀드의 지적을 받고 있다. 이사회에서 결정하는 안건들이 주주이익에 반하지 않는지, 회사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선택인지, 소수의 특혜를 받지 않는지 검증하지 않는다는 이유다. ESG투자에서 G가 의미하는 거버넌스는 한국기업으로선 가장 난감하고 대응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경제지를 포함한 다수의 보수 언론에서는 아직까지도 이를 두고 '공격'이라는 단어를 쓰곤 한다. 경영과 소유가 일치하는 국내 기업 문화에서 소액 주주들이 최대주주이자 오너에 대항하고 '덤빈다'는 시각이 담긴 표현이다. 오너 일가를 비호하려는 억양이 알게 모르게 묻어 있다. 주주가 회사의 미래를 위해 경영 과정을 검증하겠다..

단편기 2020.12.26

간만에 운동

자운봉의 이름을 따 학교 이름이 지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종종 등정해야 했던 도봉산. 어렸을 때 많이 가기도 했고 매일 보는 동네 뒷산이라 대부분 중턱까지만 갔다가 오고 말았다. 이날은 근육 좀 조일 겸 신선대까지 곧장 올라갔다. 요새 운동하기 너무 어려운 환경이라. 내려오다가 물 마시려 잠깐 앉았데 고양이 세 마리가 밀착 마크했다. 미안해. 너네 줄 건 없었어. 깊은 산에 아기 고양이가 왜 이렇게 많은지. 스치듯 본 것만 해도 네 마리. 마음이 다 녹아버렸다.

단편기 2020.12.24

호랑이

왜요. 뭘요. 몰라요. 저 세 가지 단어로 모든 대답을 돌려막았다. 무려 2년을. 아니 어쩌면 3년을. 하도 민망하게 굴어서 전화를 할 때마다 입이 말랐다. 대답에 당황한 척 않으려 질문거리와 문장을 준비해 둔 적도 있다. 얼굴도 범상, 목소리도 쩌렁쩌렁. 인간 호랑이 그 자체였다. 기싸움에서 거의 매일 밀렸던 나는 언젠가부터 네네 하지 않고 말대꾸를 했다. 오기가 생겼던 것도 있지만 악의가 있어 저렇게 행동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보통의 담력이 아니라는 것도 느껴졌다. 티격태격하면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게 오늘까지 쌓였다. 좋은 조직이라면 공이 있는 곳에 자리를 만든다. 비범했던 이 호걸은 영웅이 됐다. 회사의 기둥이 될 것이다. 완벽주의자 성향인건 알았지만 이번에 일을 같이 하면..

단편기 2020.12.23

셀프 인테리어란 무엇인가

따뜻한 흰색, 차가운 흰색, 노란 흰색, 회색빛 도는 흰색, 파란 흰색. 흰색 벽을 하려 했는데 저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단다. 내 눈엔 다 똑같은 색이다. 난감해하니 색을 보지말고 미세하게 다른 패턴을 눈여겨보라고 한다. 멀리서 보면 다 같은 하나의 면인 것을. 이번엔 벽과 천장에 쓸 벽지 종류를 고르느라 시간을 보냈다. 실크벽지와 합지를 섞을 바에야 몇 만원 더 얹어서 전체 실크벽지를 하라고 한다. 수긍이 가는 말이다. 바닥도 뭐 이렇게 종류가 많은지. 저렴한 장판으로 하고 싶어도 걷는 데 예민한 사람은 강마루를 해야 한다는 말에 또 현혹된다. 바닥 재질에 따라 걸음의 느낌이 바뀐다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다들 그런걸 감지하면서 걷나 싶어서 아둔함을 반성하며 그러겠다고 했다. 단열 효과도 더 좋다하니 마..

단편기 2020.12.22

물구나무 서기

tv쇼를 보는데 요가를 심도있게 배웠다는 한 연예인이 물구나무서기를 해서 따라해보고픈 욕심이 났다. 쉬워 보였는데 막상 해보니 영 아니었다. 목부터 허리를 곧게 세우는 일도 어렵더라. 다리 올리는 건 더더욱. 벽에서 발을 떼는 순간 중심이 안잡힌다. 그래도 요령을 익히면 버틸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서 될때까지 해봤다. 삼십분 정도 몸을 뒤집었나보다. 다음날 양 볼 쪽에 빨간 반점이 다닥다닥 생겼다. 모세혈관이 터진 것이다. 무시하고 그날 하루 더 했는데 이번엔 눈두덩이도 새빨갛게 터졌다. 거울을 보니 황당해서 말도 안나왔다. 잠깐 피 좀 쏠렸다고 이렇게 되나. 얼굴의 붉은 반점을 보고 엄마는 불쾌하다고 했다. 귀여운 주근깨라고 생각해-하고 넘기려 했는데. 섬짓한 말을 한다. 자살하거나 목이 졸려 죽은 시..

단편기 2020.12.22

헌혈

의료진이 걱정이다. 5분도 가만히 서 있기 어려운 한파 속에서 진료소에 나가 있는 분들이 고생 많았을 것 같다. 하필 이럴 때 가장 많은 확진자가 나오다니. 얼마나 고군분투 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생리대를 못갈아서 피 묻은 바지로 퇴근했다는 간호사는 자괴감을 느꼈다고 한다. 롱패딩이 가려주었으니 망정이지 옷을 새로 사야 할 정도라고 했다. 너무 추워 손이 마비돼 괴롭다는 인터뷰도 있었다. 방호복은 입고 벗기가 불편해서 화장실 가기도 힘들고 밥 먹는 것도 포기해야 할 때가 많다. '오늘 한 끼도 못먹었다'는 말은 간호사인 동생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숨 쉬기도 어렵다 한다. 이런 기사마다 댓글엔 힘내라, 당신들이 영웅이다 라는 위로의 글이 달린다. 좋은 말이지만 일선에 있는 간호사의 가족으로서 이..

단편기 2020.12.18

내성

매일 글 쓰는 일, 단점은 글을 너무 대충 쓴다는 점이다. 문장을 하나 쓰더라도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바쁠 땐 부담이 되기도 한다. 하루에 의미 있는 단서를 찾지 못할때는 소재가 없어 두렵고. 글감을 찾기보단 당장의 감정을 기록하기도 하고. 짧게 아무거나 꾸준히 쓰라고 해서 진짜 그렇게 하고 있긴한데 이런 글이 쌓여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계속 하긴 할건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중에 뽑아먹을 글이 없을 듯. 제대로 하자.

단편기 2020.12.18

내가 핑크라니

내 피부가 여름쿨톤과 잘 어울린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상상도 못한 컬러다. 아이린이나 아이유같이 투명한 피부에 어울리는 파스텔 퍼플, 파스텔 핑크 같은 그런 여리여리한 색이다. 대표적으로 딸기우유나 라벤더 색이 있다. 반신반의하며 얼굴에 시현해봤는데 찰떡이였다. 그동안 메이크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원인을 드디어 찾은 것이다. 내 파우치엔 연핑크 우유 색이 하-나도 없다. 아니 태어나서 한 번도 사본 적 없다. mlbb 컬러나 톤 다운된 오렌지, 진저톤 뿐이다. 까무잡잡한 피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햇빛에 살을 태우는 걸 좋아한다. 굽는 만큼 잘 타진 않지만 그래도 하얗고 뽀얀 피부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청초, 청순해보이는 색이 어울릴거라곤. 딸기우유는 그동안 초중학생들이 쓰는 초급자용같..

단편기 2020.12.14

시향

빈 그라인더의 나사가 하나씩 풀리고 있다. 일하는 시간에도 집에 있으니 커피를 직접 내려먹는 일이 많다. 원두를 하도 갈아대니 견고하지 않은 원목 그라인더도 이제 한계가 온 듯하다. 이 수동그라인더를 쓴 지 5년 정도 된 것 같다. 양 팔과 양 손에 힘이 꽉 들어가지만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원두 가는 소리와 함께 퍼지는 향을 포기할 수 없다. 하나 새로 사야할 것 같은데 부모님 집에는 전자 그라인더를 놔드리고, 나는 계속 수동으로 쓸 생각이다. 촉촉하고 시원한 원두의 향은 하루의 스트레스를 잊게할만큼 황홀하다. 사진처럼 향도 전송할 수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매일 아침마다 보낼 것이다. 향을 맡아보라며 코 앞까지 잔을 들이대는 것도 같은 마음이다. 내가 시향을 권했다면 그는 내가 정말 사랑한 사람임을.

단편기 2020.12.12

빌런이 사라졌다

그렇게 악착같이 일했던 a 임원도 결국 올해를 넘기지 못했다. 올해 중반부터 그의 거취를 두고 왈가왈부한 사람 중에 하나가 나였는데. 견고했던 그가 fa 시장에 나오니 기분이 묘했다. 비굴하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동종 업계 사람들이 입 모아 말할 정도로 영혼을 갈아 일을 한 사람이다. 가장 큰 약점은 거짓말이었다. 관련 에피소드는 쏟아질 정도다. 이런 평판 속에서도 오래간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양질을 떠나 그는 분투했다. 여러 사람들의 거친 평가와 달리 그는 식사 자리에서 점잖았다. 솔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아는 것은 당연히 많았다. 말이 많았지만 선은 넘지 않았다. 다른 이야기지만 그는 내 지인이 앞가림할 수 있게 거두어 챙겨주기도 했다. 이런 면을 알기에 그의 치열한 삶을 깎아내리..

단편기 2020.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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