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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기 140

절주

술도 못하는 주제에 이런 거창한 제목이라니. 일주일에 최소 한 번은 술을 크게 먹고 있다. 심할 땐 5영업일 내내. 회식이나 저녁 자리 아니더라도 습관적으로 저녁에는 술 한 잔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농담으로 술 중독자라고 할 정도로 예전보다 많이 먹고 또 즐기고 있음. 술로 별 일이 다 생긴다. 안먹던 걸 갑자기 들이붓다 보니 어느 순간엔 몸 안의 열이 제대로 순환이 안 돼 피부가 뒤집힌 적도 있다. 작년인가 올해 초의 일이었던 것 같다. 이때 처음으로 내 돈 주고 한약을 지어 먹었다. 한의사는 한 달 더 먹어보라 했지만 급격히 나아져서 더 복용하진 않고 있다. 지금은 프로바이오틱스를 먹고 있다. 술은 관우처럼 먹어야 하는데 이제는 장비처럼 마시고 있다. 예전보다 술이 늘었다는 자만감 때문일 듯. 소주엔..

단편기 2019.11.06

Forbidden city

자아가 형성되기 전 본 것 중 기억나는 몇 안되는 영화. 아빠가 좋아하는 영화다. 지금은 내가 더 좋아하는 영화. 사카모토 류이치 음악 듣고 싶어서 다시 봤다. 개인적으론 여기에 쓰인 음악이 류이치 아저씨 인생작인 것 같다. 들을 때마다 심장이 너무 나대. 후궁이 황제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이혼하는 장면에서 하필 노래가 풀로 나오다니. 다시 보니 류이치 아저씨 후반부에 괜히 엄청 나온다. 비중이 큰 역할도 아닌데 혼자서 엄청 심각. 음악을 너무 잘 만드니 감독들이 사심 담아서 더 챙겨준 듯 하다. 다큐멘터리에서도 이런 비슷한 얘기 했던 것 같은데.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문이다. 시대가 변화할 때마다 공간이 열리고 닫겼고 황제는 운명에 따라 매번 그 시류 속에 갇힌다. 입궁한 후부터의 삶은 감옥살이와 ..

단편기 2019.11.03

무제

머리 속에 사진처럼 선명히 남는 장면들이 있다. 보통은 글을 통해 찰나를 설명하지만, 어떤 순간엔 언어의 한계를 절실히 느낄 때가 있다. 그럴땐 차라리 그려내는 것이 낫다. 다소 추상적이더라도 색이나 형태를 써 보이지 않는 공기까지 복원해 낼 수 있어서다. 머리 속에 있는 많은 생각 중 글로는 꺼내기 어렵거나, 글로 쓰기 차마 아까운 이야기들. 없는 손재주로라도 그것들을 밖으로 꺼내보려 했다. 어떻게든 기록해두고 싶고, 내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싶다. 그래서 1년간 소묘를 했던건데 최근 일 년은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좀처럼 그리고 싶은 거리가 없었다.

단편기 2019.11.03

기다려지는 책

=인생 여정의 99%가 비극의 연속이라는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인생은 비극으로 종료된다. =구내식당의 점심 반찬이 잘 나온 것과 같은 사소한 일에라도 행복을 느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겸손한 마음으로 소소한 즐거움과 같은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아가야 우울증을 간신히 견디기라도 할 수 있다. =최악의 상황은 스스로 우울한 기분에 빠져들면서 신파극을 써 나가는 것이다. [출처: 중앙일보] 이국종의 고백 "나는 항상 우울하다, 그래도 그냥 버틴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616677

단편기 2019.10.28

러너

언니는 나만큼이나 새로운 걸 찾는 사람이다. 쉴 틈 없이 무언갈 꾸준히 하는 사람. 손재주가 많아 할 수 있는 취미생활도 다양하다. 하여튼 새롭게 부상하는 것은 한번씩 꼭 해보는 것 같다. 흐름을 무척 잘 따라가는 것 같기도 하고. 신문물을 접하게 되어 언니한테 말하면 언니는 이미 써봤거나, 그 다음 세대의 것을 알려주는 식. 전자기기, 요즘 핫한 앱, 떠오르는 미드, 모두 나보다 한 발 먼저 나아가 있다. 내가 뭐든 물어봐도 어떤 식으로든 답을 줄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언니는 보통 운동과 관련한 것을 하려할 때 나에게 같이 하자 묻는다. 내가 제일 호응이 좋아서일 수도 있고 운동에 거부감이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걸 해보는 데 취미가 있다는 걸 알기도 할 거다. 재작년이었나. 한강을..

단편기 2019.10.27

할머니 예뻐요

옷을 사고 있는데 아빠에게 급히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대노했다고 한다. 왜 자기만 빼고 쇼핑을 갔냐고. 사실 할머니를 빼고 간게 아니다. 할머니 댁과 우리 집은 지하철로만 1시간 거리이고, 오늘은 아빠만 할머니 댁에 방문할 예정이었으며, 나는 태어나서 할머니와 백화점에 옷을 사러 간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냥 할머니는 손녀딸 결혼 준비에 끼고 싶으셨던 거다. 친가 쪽에서 하는 오랜만의 결혼인데 다들 간만 찾아온 축제 분위기(?)를 즐기고 있다. 할머니는 오죽할까. 할머니의 뜬금포 분노에 당황한 아빠가 어디서 옷을 사고 있냐고 물었다. 여기로 모시고 바로 오겠다고 한다. 쇼핑하고 싶은데 안데려갔다고 진노하셨다니 너무 귀엽잖아. 한편으론 오셔서 저기압 상태인 할머니를 보게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됐다. 남동..

단편기 2019.10.20

이어령 교수 인터뷰/조선일보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이어령 마지막 인터뷰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 https://m.chosun.com/svc/article.html?sname=news&contid=2019101803023 -그런데 요즘엔 탄생 자체를 비극으로 보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인간은 내 의지로 세상에 나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래서 안 태어나는 게 행복했다, 어쩔 수 없이 태어났으니 빨리 사라지는 게 낫겠다, 이렇게 반출생주의적인 사고를 하는 건 무의미해. 제일 쉬운 게 부정이에요. 긍정이 어렵죠. 나야말로 젊을 때 저항의 문학이다, 우상의 파괴다, 해서 부수고 무너뜨리는 데 힘을 썼어요. 그런데 지금 죽음 앞에서 생명을 생각하고 텅 빈 우주를 관찰하면, 다 부정해도 현재 내가 살아 있다는 건 부정..

단편기 2019.10.19

혐오 시대의 희생자

그녀가 세상을 포기했다. 사람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한 마디씩 거든다. "시대의 아이콘이었다...여성 혐오에 맞섰다...악플러 반성해라..." 위로의 의미겠지만 공허하다. 그의 고통스런 죽음을 이렇게 아름답게 포장하려 하는게 부자연스럽다. 아이콘보다는 시대의 희생자라고 표현해야 맞지 않나 싶고. 개인적으로 난 그녀가 말하고자 했던게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보다 피부가 얇은 예민한 예술인으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남다른 표현법이었을 걸로 짐작된다. 나는 그런 삶을 살지 않으니 예술가의 삶의 방식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노브라'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는 역할도 했지만 모든 행동이 다 공적인 메시지를 내포했던 것은 아니다. 로리타적인 사진을 찍고 그걸 올렸던 건 그 안에 들어있은 메시지가 어쨌..

단편기 2019.10.16

사과나무 아래서 오렌지 향을 기대한다면

를 읽다가 잠시 멈췄다. 플로베르의 평전의 형식을 띄고 있는 소설인데다, 몇몇 작품과 소재가 소설 안에서 주요하게 다뤄진 탓이다. 이를 읽지 않고는 이 이야기에 깊게 공감하긴 어려울 것 같아서. 은 오며가며 서점에서 빠르게 훑어보듯 읽어야겠다. 알고 있는 플로베르의 소설은 .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작품이지만 작가는 이 소설을 싫어했다고 한다. 이혼을 허용하지 않았던 1850년대 프랑스 사회에서 불륜은 만연했고, 불륜은 그때의 대중적인 소재였다고. 작품성을 인정받기보단 킬링타임용으로 쓴 로맨스적 막장 소설로 치부되 그런걸까. 자신이 쓴 다른 소설들은 만큼 흥행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한 수작이 히트작에 가려졌다는 분노 때문에 더 싫어했을지도. 노래도 그렇지 않나. 심혈을 기울여 만든 노..

단편기 2019.10.13

"적어도 ~ 라고 하진 않겠죠."

언론인 출신 프랑스 정치인 조르주 클레망소가 제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두고 바이마르 공화국 대표와 대화를 나누던 중 받은 질문. 1차대전의 원인에 대해 미래의 역사가들이 어떻게 평가할 것 같냐는 것. 클레망소의 대답은 이랬다. "적어도 벨기에가 독일을 침공했다고 하진 않겠죠."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가능하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고, 부정될 수 없는 사실적 진리는 존재한다. 이렇게 보면 이게 맞고, 저렇게 말하면 저게 맞는 것 같지만 그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다 보면 결국 반박조차 어려운 분명한 사안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번 사태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사실을 두고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되고 또 풀이되면서 세상이 다소 시끄러워졌지만 부인할 수 없는 수개의 사실들이 있다. 수호하려는 사람들과 ..

단편기 2019.10.05

없는 것(空)

1년 남짓한 시간 투병 생활을 한 친척 동생은 힘겹게 져버렸다. 상주로서 서 있던 48시간은 아득하지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검은 색 한복차림의 상복차림도 리본이 달린 머리핀도 처음이었다. 더욱이 나와 동갑인 친척동생을 잃어본 것도. 상주로 있으니 많은 말을 들었다. 위로한답시고 던진 말들은 이모에게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 가령 "생각보다 밝아서 다행이다" 같은. 마음의 준비를 해왔던 가족들이지만 납득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왜 꼭 이런 말은 시댁 식구가 하는 걸까. 이모는 손님이 거의 떠난 자정이 되어서야 통곡 하듯 울었다. 잘생긴 아들의 영정 사진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깝고 안타까운 마음은 상이 끝난 후에도 지워지지 않는다. 일상적인 시간을 보내다가도 문득 그가 이 세계 안에 없다는 사실..

단편기 2018.07.22

"딸, 옷사러 갈까?"

37도, 사람의 체온보다 높은 더위가 지나는 7월의 어느 주말. 딸을 만나러 카페에 온 그녀는오늘 계모임에서 먹은 화려한 점심 메뉴를 시작으로 젊었을 적부터 알던 오랜 이웃의 불륜 이야기까지 술술 풀어놓았다. 내가 주목한 것은 그녀보다 그녀의 딸. 나이 든 엄마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적절히 호응하고엄마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질문을 하기도 하며 원피스를 입고 있으면서도 즉흥적으로 지금 당장 볼링을 치러가자는 엄마의 고집에도 웃으며 "그러세요. 그럼" 하며 너그러이 대응해주는. 착한 딸. 아니 그보다는 좋은 딸.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딸에게, "옷 사러 갈까? 엄마가 옷 사줄께." 한다. 참 오랜만에 듣는 말. 예전에 나의 엄마도 저 말을 참 많이 했던 것 같은데. 참 약아빠진 나라는 존재.

단편기 2018.07.22

너희들에게서 피 냄새가 난다

​ “너희들에게서 피 냄새가 난다” 수년 전 카톡 프로필에 썼던 문장이다. 서울대생 강의에 간 한 시인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그 자리에 한 학생들에게 던진 한 마디였다. 경쟁이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수많은 학우들을 짓밟고 온 데 대한 칼같은 꾸짖음이었다.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 올라온 자리이니 들뜨지 말고 자중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때 시인의 말은 어른의 말로 들렸다. 2018년, 그 시인은 성폭행 의혹을 온 몸으로 거부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떳떳하다고 주장한다. 피해자가 늘어나는 이 상황에서도. 서울대생을 꾸짖었던 건 다름 아닌 En, 고은 시인이다. 당신 이름에서 피비린내가 난다. 아주 뜨거운 피의 냄새. 한 순간 당신의 문장에 감동했던 내가 가엽다. 오늘도 피해자가 나왔다. 내일도 피해자는 나올..

단편기 2018.03.05

그대로야?

​ 점심 시간 병원 가는 길, 취재원과 통화하며 걷고 있는데 점심을 먹으러 이동하는 듯한 무리 속에서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서로 눈을 돌렸다가 다시 눈길이 통했다. 남자는 갑자기 두 눈이 동그래져서는 발은 무리와 함께 가면서도 몸은 내 쪽으로 돌려 양손을 격하게 흔들기 시작했다. 잉? 누구더라. 맞아. 분명 나도 아는 사람인데. 마치 컴퓨터가 이진법으로 데이터를 찾듯 머리 속이 기억을 찾아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저 반가워 하는 표정을 봐. 빨리 기억해 내야해. 윙-윙. 가장 먼저 생각난 건 저 사람 다니던 학교. 같이 다니던 단짝 친구. 그리고... 맞다, 오빠다. 취재원과 통화하고 있던 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표정만으로 최선을 다해 반갑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최대한 눈과 입을 크게 만들었..

단편기 2018.01.09

삶의 무게

아들의 수술을 앞둔 전날, 이모가 정신이 잃어가듯 전화를 걸었다. 자꾸 수술 안 하고 싶대. 3개월 남았다고 어떻게 말하니. 지금이라도 말해야 되니. 나 어떻게 해야해? 엄마는 어떤 대답도 못하고 마음을 굳게 먹으라는 말만. 끊고 나서야 엉엉 가엾어 울었다. 3개월의 시간. 혹은 일말의 희망이라도 찾아보기 위한 수술. 이런 기막힌 난제가 세상에 또 있을까. 배 아파 낳아 금지옥엽 기른 막내 아들이 하필. 왜 하필! 엄마는 또다른 언니, 그 많던 여자 형제들이 세월 속에 사라졌네,에게 전화해 차마 못한 설움을 뱉었다. 왜 우리에게 자꾸 이런 일이...하는 절규에 가까운 울음. 이들 삶의 무게감 앞에,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오늘 나의 삶, 근소하게 비켜갔음에도 옆에 펼쳐진 지옥이 마음 떨리게 무서운 밤이다.

단편기 2018.01.03

끔찍한 서울의 아름다운 겨울

다시 병원에 입원한 사촌을 보고 왔다. 그는 최근 다시 암이 재발했다. 살이 더 빠져있었다. 진통제 없인 밥을 먹지도 못한다고 했다. 암으로 언니와 오빠를 잃은 이모는, 그리고 본인도 암으로 고생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은 모습이었다. 어쩌면 친척동생보다도 가장 위태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아들을 살릴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나는 잠만 자는데 뭐. 일어나고 나서가 오히려 걱정이다. 하는 녀석의 덤덤한 농담에 내가 괜히 위안을 받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 다음 세대에도 암 발병 위험에 노출됐다는 점은 엄마 아빠가 가장 걱정하는 일 중 하나가 됐다. 올림픽대로를 건너 강북으로 넘어오는 길엔 아파트 불빛이 가득 정면을 채웠다. 무수히 빽빽한 아파..

단편기 2017.12.27

응원

실제로 이 취재원을 만난 건 3-4번 정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다른 취재원들보다 정겹기도 하고, 또 도움도 많이 받은 터다.특별히 오전 미팅에 커피를 사들고 갔다. 간만에 보는 취재원과의 아이스 브레이킹에 도움이 되리라. 아니나 다를까. 마치 그가 곧 직장을 떠나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딱 타이밍 좋게 인사하러 간 셈이 됐다. 사간 커피는 이별 선물처럼 여겨졌다. 계약이 만료돼 다음 달이면 지금의 직장을 떠난다는 취재원. 더 좋은 곳으로 갈 수도 있고, 아니면 원래 몸 담았던 정글로 돌아갈 수도 있고.아직 결정된 건 없어 당분간 쉴 수도 있다는 말도 한다.더불어 그는 한번도 묻지 않았던 나의 거취에 대해 묻는다. 험난한 세상 어찌 살아갈 계획이십니까. 저도 고민이 많습니다. 했다. 자신이 많이 살아본 ..

단편기 2017.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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