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기

절주

Post truth 2019. 11. 6. 00:54

술도 못하는 주제에 이런 거창한 제목이라니. 일주일에 최소 한 번은 술을 크게 먹고 있다. 심할 땐 5영업일 내내. 회식이나 저녁 자리 아니더라도 습관적으로 저녁에는 술 한 잔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농담으로 술 중독자라고 할 정도로 예전보다 많이 먹고 또 즐기고 있음. 

술로 별 일이 다 생긴다. 안먹던 걸 갑자기 들이붓다 보니 어느 순간엔 몸 안의 열이 제대로 순환이 안 돼 피부가 뒤집힌 적도 있다. 작년인가 올해 초의 일이었던 것 같다. 이때 처음으로 내 돈 주고 한약을 지어 먹었다. 한의사는 한 달 더 먹어보라 했지만 급격히 나아져서 더 복용하진 않고 있다. 지금은 프로바이오틱스를 먹고 있다. 

술은 관우처럼 먹어야 하는데 이제는 장비처럼 마시고 있다. 예전보다 술이 늘었다는 자만감 때문일 듯. 소주엔 여전히 취약하지만 그래도 소맥 몇 잔은 쉽게 털어낼 수 있다. 독주가 의외로 잘 맞고 와인도 한 병까진 어떻게든 꼿꼿이 있을 수 있다. 얼굴이 빨갛게 변하는 건 내 능력 밖의 문제. 하지만 자세가 흐트러지는 건 정말 참을 수가 없다.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정확히는 그만큼 술을 자셔야하는 것)은 스스로 용서가 안된다. 얼마 전엔 블루투스 이어폰 한 쪽이 손에서 미끄러져 하수구로 떨어졌다. 평소의 반응 속도였으면 충분히 잡았을 건데 술 먹어서 판단이 느려 잡지 못했다.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가는 이어폰을 멍청하게 보고만 있었다. 이것도 일종의 사고지만 긴장을 풀었다는 방증 같아서 꼴사나웠다. 핸드폰을 잃어버린다면 그땐 세상을 떠나는 게 맞는 듯. 주저리 했던 말들도 모두 주어담고 싶다. 제발 쫑알쫑알거리는 입 좀 다물고 있음 안될까. 다음 날 했던 얘기가 다시 다 생각나는 게 너무 괴롭다고. 

뭐 그런 걸로 이렇게 심각하게 구냐고 할 수도 있다. 한 선배는 남에게 피해 주길 싫어하는 집착 같은 무언가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사실 맞다. 무너진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마음 쓰게 하거나 폐 끼치는 게 싫다. 필름이 끊겨보지 않았던 것도 긴장하는 마음과 연결이 될 수 있으려나. 완벽하게 내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긴장을 풀면 더 큰 사고가 날 수 있으니 조심하자는 마음이다.

문제는 요즘 자주 흐트러지고 있다는 거다. 술로 빚어진 최근의 역사를 일일히 읊기도 부끄럽지만, 아무튼 그런 기억들이 너무 불쾌하다. 가장 최근 술자리에서 졸았다는 건 사실 좀 충격이었다. 나는 꼿꼿했다고 생각했는데, 졸렸던 기억이 없었는데. 졸았다고 한다. 나보다 어른인 사람도 있는 자리에선 더더욱 그러면 안되는 건데 왜 그랬는 지 이해하기 어렵다. 아직 큰 물건을 잃어버린 적은 없지만 이런 식이라면 이것도 시간 문제일 것 같다. 주량 이상으로 자꾸 마시려하는 관성이 생긴 게 가장 큰 이유일 듯. 주변에서 술 늘었다고 하면 신나서 더 마시려고 하는 단순한 사고 회로에서 벗어나야 한다.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양이 아니라, 절제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몇가지 실수를 했다면 나는 그렇지 못한 사람. 후회와 반성만 열심히 하지 말고 능력껏 조절하면서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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