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기

디즈니 심폐소생기

Post truth 2020. 12. 26. 18:28

 


국내 기업의 경영 문화에 새 바람이 불고 있다. 특히 거수기 역할만 하는 국내 기업의 이사회는 지난 5년간 국내외 행동주의 펀드의 지적을 받고 있다. 이사회에서 결정하는 안건들이 주주이익에 반하지 않는지, 회사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선택인지, 소수의 특혜를 받지 않는지 검증하지 않는다는 이유다. ESG투자에서 G가 의미하는 거버넌스는 한국기업으로선 가장 난감하고 대응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경제지를 포함한 다수의 보수 언론에서는 아직까지도 이를 두고 '공격'이라는 단어를 쓰곤 한다. 경영과 소유가 일치하는 국내 기업 문화에서 소액 주주들이 최대주주이자 오너에 대항하고 '덤빈다'는 시각이 담긴 표현이다. 오너 일가를 비호하려는 억양이 알게 모르게 묻어 있다. 주주가 회사의 미래를 위해 경영 과정을 검증하겠다는 건 당연한 권리다. '잘' 못하면 경영진을 교체할 수 있고 그게 어렵다면 경영진 선임하려는 인물을 반대해야 하며 견제할 수 있다. 모든 경우를 싸잡아 주주행동주의를 약탈적 세력으로 평가절하 하는 건 주의해야 한다. 

 

언론의 이런 비호도 한계다. '동학 개미 운동'으로 수익 실현에만 집중하던 주주들이 주주권 행사에 눈을 뜨고 있다. 가깝게는 LG화학의 배터리 사업부 분할 사례가 있다. 물적분할로 자회사화 될 경우 기존 주주들에게 얼마나 실익이 있는지가 한동안 화두였다. 개인적으로 IPO 목적으로 떼어낸 거라 장기적으로 석유화학 사업에 눌려있던 배터리사업부 가치가 제 값을 받고 상장 후 지분법으로 반영되면서 LG화학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발표 당시 주주들의 반발은 극심했다. '치킨을 시켰는데 무만 온 꼴'이라는 비유까지 나왔다. 과거엔 경영 방식에 불만이 생기면 갖고 있던 주식을 팔고 나가는 것으로 끝났지만 이제는 많은 주주들이 임팩트 있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안에 따라 소액주주들이 단합해도 경영진의 의사를 엎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이런 흐름 속에서 오너 혹은 CEO의 의사결정 과정은 과거보다 더 투명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LG화학 역시 발표 당시 여론은 경영진의 판단을 비판하는 쪽으로 쏠렸지만 건설적인 공방 끝에 주주들은 성장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에 무게를 실었다. LG화학 주총은 (국민연금이 반대한 것만 빼고) 무난히 넘어갔다.  

 

 

 로버트 아이거 디즈니 그룹 회장이 쓴 <디즈니만이 하는 것>를 보면 국내와 너무나도 다른 기업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선 당연한 것들이 이 나라에선 어쩌라고so what이라는 질문으로 되돌아 온다. 이사회가 똑바로 안하면 주주들의 천문학적 소송이 기다리고 있다. 디즈니 오너일가(최대주주)는 이사회는커녕 한동안 회사와 관련된 역할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다가 아이거의 배려로 '고문'으로서 대우 받는다. 전세계 최고 기업인 디즈니의 CEO 조차 인수합병 때마다 이사회와 전투를 치룬다. 픽사, 마블, 루카스필름, 폭스그룹을 짧은 임기동안 불도저처럼 성사키셨으니 그 과정에서 얼마나 큰 불꽃이 피었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어쨌든 이 책은 미국 기업의 깐깐한 이사회를 거쳐 CEO로 선임되고 다 죽어가던 디즈니를 어떻게 전세계 최고 미디어 그룹으로 끌어올렸는지 보여준다. 미디어업계 M&A의 교과서...라고 하기엔 파격적인 성공 사례. CEO들이 M&A전 어떤 식으로 협상을 하고, 어떤 부분에서 긴장을 하며, 인수 대상과 사전 교감을 어떻게 하는 지 후일담을 공개했다. 픽사 인수를 알리는 언론 발표회를 30분을 앞두고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췌장암이 재발했다는 사실을 인수자 측에 비밀리에 고지한다. '지금이라도 인수 계획을 접어도 된다'고 한 건 영화의 한 장면이 따로 없다. 

 

 

스티브 잡스를 이사진으로 영입했을 때의 효과를 M&A 가격에 담았던 점도 흥미롭다. 디즈니는 픽사를 인수할 때 고려한 장점 중 하나로 픽사의 최대주주였던 스티브 잡스를 이사회 멤버로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메가 M&A를 성사키기고도 잡스라는 인물의 후광에 가려질 수도 있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스티브 잡스와 같은 '스타 이사진'이 경영진의 판단에 힘을 실어줬을 때 회사의 가치가 어떻게 상승할지 그 파급력을 M&A 가격에 포함했다. 물론 잡스가 안건에 반대할 경우엔 개망신 당할 수 있지만 그런 리스크를 감내하고라도 그를 섭외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잡스가 뒷통수 친 적도 있다. 게임과 만화를 싫어하는 잡스는 디즈니가 마블을 인수하기 위한 주총에서 반대표를 행사했다. 무기명 투표라 누가 반대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1억주 이상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잡스 뿐이었다. 아이거 회장은 잡스에게 호소했고 겨우 마음을 돌렸다.

  

10년간 고전했던 디즈니는 신흥 강자인 픽사의 기술력과 작품성이 우위에 있음을 인정하면서 지금의 회사를 만들어냈다. 나의 경우 <인사이드 아웃>을 인생 최고의 애니메이션으로 생각하는데 이 영화는 픽사가 디즈니에 인수된 후 만든 작품이다. 디즈니가 합병 후 픽사를 디즈니화 했다면 나오지 못했을 영화다. 로버트 아이거는 픽사 인수 전 잡스에게 디즈니의 중앙 집권적 경영 방식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최대한 픽사의 문화를 살리겠다고 했다. 영화가 시작할 때 픽사의 마스코트인 룩소 주니어가 디즈니의 성을 비추는 장면은 이 같은 다짐을 반영한다. 또 그룹의 '미전실'같은 조직을 없애 버렸다. 강력한 권한을 가진 미전실을 없애니 각 파트의 임원들이 더욱 열성적으로 일했다고 한다. 

 

 

디즈니는 2년 전부터 OTT도 준비해왔다. 미디어 지형 변화를 감지하고 플랫폼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아직 디즈니 OTT가 안열렸지만 시장 파급력은 클 것으로 예상된다. 콘텐츠로 경쟁이 어려운 국내 ott 업체들은 이 때문에 어떻게든 디즈니와 제휴하려 노력하고 있다.

 

디즈니의 성장보다 더 놀라운 점은 로버트 아이거의 이력이다. 한국 미디어의 공채 시스템은 순혈주의가 너무 중요하다. 흠결이 없는 사장 후보자를 매년 뽑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로버트 아이거는, 방송국 제작 보조로 일을 시작한 사람이다. 우리로 치면 AD나 FD였던 사람이 실력으로 버텨서 KBS 국장, CJ ENM 사장이 되는 형태다. 아이거는 한 계단씩 거쳐 ABC스포츠에서 승진을 쭉 하다가, ABC가 디즈니에 인수합병되면서 전환기를 맞는다. 피인수 기업의 인사가 디즈니의 CEO직까지 올라간 저 인물도 대단하지만 성과로 이야기하는 인사시스템이 여러 면에서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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