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2020.07]제주도

신령스러운 그 곳

Post truth 2020. 7. 21. 02:57

 

 

6시 기상. 무릎이 회복되기도 전에 목표했던 날이 다가왔다. 아침에 상태를 체크했는 데 여전히 양 무릎은 온전히 걷기에 적합치 않았다. 뭐 어쩔 수 없당. 걍 가야지. 운동용 레깅스와 무릎보호대가 잘 잡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버스를 타면 영실매표소 입구까지 40~50분 걸려서 그냥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절대 버스를 놓친게 아니다ㅠㅠ어떻게 한시간에 한 대 있냐) 한라산엔 음식 살 곳이 없어 편의점에서 김밥과 초콜릿 몇 개, 탄산수를 쫄랑쫄랑 들고 갔다. 그렇게 도착한 영실휴게소. 1100고지 타고 달리는 데 멀미나서 빨리 내리고 싶었다. 이 비용에 이 노력이면 그냥 내가 운전해서 가는게 나을 것 같아. 웩웩.

 

 

7시 조금 넘겨 등반 시작. 오랜만에 듣는 시냇물 소리. 놀라운 건 이 시간에 내려오시는 분이 계셨다. 그분은 새벽에 갔더니 옥상이 겨울 날씨라며 아직도 바람막이를 못 벗겠다 하셨다. 언제 오르신거에요 하니 4시반이라고. 고생하셨다, 조심히 가시라 서로에게 안부를 전하고 헤어졌다.

 

 

영실코스가 원래 이런 데크가 잘 깔린 길이 아니었다고 한다. 데크가 있어 수월하게 올라갔다. 등산길이라기보단 계단길이 대부분. 뒤돌아보니 서귀포 풍경이 보인다. 이번에 못간 남쪽 지방을 이렇게 눈으로 찍고 가네. 저 끝에 산방산, 멀리서 봐도 멋지고 경이롭다.

 

 

천천히 오긴 했는데 벌써 1500?? 뒤따라 오던 사람들 먼저 보내며 오백장군바위(전설은 왜이렇게 끔찍한지. 오백명의 아이를 먹일 죽을 끓이다 엄마가 빠져 죽었는데 아이들이 그걸 맛있게 먹다가 뼈를 발견해 바위가 됐다는...)의 바위가 500개 맞는지 숫자 셀만큼 느긋하게 즐기며 올라갔는데. 

 

 

벌써 고난이도 길이 끝나간다니. 다리만 정상이었으면 40~50분안에 주파할 수 있을 것 같다. 관음사 코스 생각하며 긴장하다 현타옴. 성판악의 난이도는 담번에 어떻게 조절해야 할까.

 

 

죽은 나무에서 감동 받아도 되나

 

 

구상나무라고 함

 

 

코스 중간중간 놓인 구급함. 아프면 이런게 잘 보여요. 열면 개미 소굴일것같아 포기했다.

 

 

윗세오름 진입로. 사실상 평지. 그리고 한라산에서 가장 멋진 구간. 분화구에 오르지 못해도 서벽~남벽을 둘러 가는 길은 스위스 부럽지 않다. 영실이 무슨 뜻인고 하니 신령스러운 곳이라는 의미라고. 이정도면 신으로 섬겨도 되지 않을까.

 

 

이정도 오르니 바람이 많이 분다. 새벽에 오신 분은 얼마나 추웠을까. 여름에도 단디 입을 것.

 

 

슬슬 무릎이 고만하라고 신호를 보낸다.

 

 

사람 오는 줄 알고 기다린 까마귀. 먹을 것을 주길 기다린다. 윤기가 차르르 한 것이 도도했다.

 

 

휴게소 도착. 고등학교 때 온 이후로 처음인데 기록이 새록새록나네. 개느긋하게 왔는데도 아홉시 반 정도에 도착. 김밥 먹자.

여기서부턴 선택사항. 다시 영실로 내려가던지, 어리목으로 내려가던지 정할 수 있다. 아니면 남벽분기점을 거쳐 서귀포로 내려가는 돈내코로 빠지던지. 나는 남벽분기점으로 갔다가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와서 어리목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한 친구가 다시 돌아올거면 남벽분기점으로 갈 가치가 있어? 라고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지만 실망할 것 같진 않다고 했다. 여기에서 실망할 풍경 찾기가 더 힘들 듯.

 

 

목표한 자리에 도착. 얼마 전 신혼부부가 와서 길을 잃었다가 동사했다는 곳이 여기 근처라고. 분화구를 오르는 길이 있었는데 무너지면서 막혔다고 함. 한 겨울에 그 길을 찾아나서다 결국 조난 요청을 했는데 찾지 못해 나중에 발견됐다 함. 여기 한라산 코스를 순찰하는 공무원 선생님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된 이야기. 선생님은 이 자리서 지킴이 겸 안내 역할을 하고 계셨다.

이 분에겐 여길 오르내리는 게 하루 일과일텐데 이런 신의 직장이 있을까, 진심으로 부럽다 생각을 했다.선생님과 소담 나누다 돌아가려는데 무릎이 걱정된다. 

 

 

스위스 안 부럽다 

 

 

계단 지옥... 실제론 짧은 코스인데 몸이 안좋아서 부담스럽게 느껴짐. 하중이 실려 무릎에 더 부담이 컸다. 숨 한 번 쉬고 발 한 발 떼고를 반복. 사람들이 걱정스럽게 말 걸기 시작한다. 어디 다쳤어요? 파스 좀 줄까요? 아이젠 드릴까요?

 

 

내 평생 처음 보는 광경. 뱀이 똬리를 틀고 한 여름에 길 옆에서 자고 있어. 죽은 건가 싶었는데 살 안쪽에서 숨 들이쉬고 내뱉는 움직임이 보였다. 엄마가 아이에게 말했다. 야 너 뱀띠잖아. 아이는. 그래도 좀 징그럽고 무서워. 키가 큰 걸 보니 나랑 한 바퀴 차이나는 띠동갑 친구였다. 두 바퀴 차이나는 친구는 벌써 유치원 졸업반이고 내년에 초등학생이 된다는 걸 인지했다.

 

 

어리목 코스 입구. 울지 않은 게 용하다. 한 시간에 걸쳐 내려올 수 있는 걸 세시간 걸려 왔다. 내려오는 데 아까 그 공무원 선생님이 레일을 따라 어린이 기차 같은 걸 타고 내려 오시더라. 내 상태를 보곤 타는 게 어떻겠냐고. 750m남아서 그냥 가보겠다 했다. 그럼 천천히 내려오시라. 하고 떠나심. 

 

 

어리목 버스정류장. 돌아가는 길에 미술관 하나 들릴 예정이었으나 병원엘 가야겠다.

 

 

과감히 퇴행성 관절염이 우려된다고 단정해버리는 의사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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