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2020.07]제주도

휴가의 휴가

Post truth 2020. 7. 19. 01:38

 

무릎이 심상치 않았다. 자고 일어나도 왼쪽 무릎은 폈다 굽히는 동작이 어려울 정도.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오른쪽은 그보다 덜 했지만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휴 올레길 그 정도 난이도에 무너지다니. 내 다리에게 실망했다ㅠ.ㅠ

사실 오늘도 다른 올레길을 걸으려 했다. 어떻게든 걸어볼 수는 있었겠지. 하지만 오늘 무리했다간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한라산 등반 일정을 못가게 될 것 같아 일보후퇴하기로 했다. 몸을 편안히 두고 최대한 안정을 취하자. 휴가를 잘 보내기 위한 휴가, 휴가의 휴가가 주어졌다.

걷지 않아도 되는 곳을 떠올렸다. 대신 여기선 안 펴볼 생각이었던 노트북과 곁가지를 좀 챙겼다. 안 그래도 이리저리 연락이 와 처리해야 할 일도 있었다. 휴가 끝으로 미룰 바에야 그냥 오늘 처리하지 싶다. 여러모로 잘 됐다. 30~40분정도 걸려 도착한 해변엔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해수욕장을 들어가기엔 좀 춥다고 느껴졌다. 볕은 세지만 땀 한방울 나지 않을만큼 청량한 날씨였다.

스타벅스가 있는 몇 안되는 해변 중 한 곳이지만 여기에서까지 스타벅스 이름을 보는 게 지겨워서.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 찾은 카페. 새로 올린 건물 같았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오션뷰가 상당했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건지 평일이라 그런 건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있는 내내 독점해 쓰다시피 했다. 창을 다 열어두어 짠내나는 바닷바람이 훅훅 들어왔다. 따뜻한 커피를 몇 잔씩 마셔도 답답하지 않은 좋은 온도였다.

바다를 보다 커피 마시고 일 좀 하다 전화통활 하고 다시 바다를 보다 아까 산 책을 읽었다. 6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흐렸던 날씨가 풀리면서 바다 빛은 갈수록 투명해졌다. 바다에선 서퍼들이 파도 위를 날았고, 그 옆 동산에선 행글라이더가 하늘을 날았다. 행복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행복한 광경이다. 행복하니 배도 고프지 않았다.

해가 지기 전 해변 가까이 저 모래는 한 번쯤 밟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침내 카페를 나왔다. 아니었으면 달이 떠도 커피를 핑계로 앉아있었을 지 모른다. 아쉬웠다. 몸 편히 쉬기 싫었는데 막상 쉬니까 너무 좋잖아!!!

관절에 힘을 주지 않으려 우스꽝스런 걸음걸이로 해변가까지 나갔다. 무릎에 자극 주지 않으려 정말 정말 최선을 다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걷는 속도만 보고 느긋하고 여유있게 이 경치를 즐기고 싶어하는 세상 낭만적인 사람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오두방정이라해도 어쩔 수 없다. 한라산은 나에게 그만큼 절대적이다. 사고뭉치처럼 굴었던 어제의 나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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