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2017.06]이탈리아

라벨로에서 공연을

Post truth 2018. 5. 10. 00:08



20명이 겨우 탈 수 있을까. 오기로 한 시간보다 40분 늦게 도착한 마을 버스는 작은 풍채에도 이유 없이 당당했다. 새로운 숙소 체크인까지 남은 시간은 40분 남짓. 한여름인데도 등줄기에선 식은 땀이 흘렀다. 10만원 깨질 각오를 하고 택시라도 타야할지 고민하던 차였다. 

버스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탔다. 관광객은 나 뿐이었다. 일단 탔으니 됐다. 얼마나 걸리겠어. GPS로 보면 직선거리는 얼마 되지 않던데. 

불안감은 5분만에 다시 목을 타고 올라왔다. 작은 마을버스는 이탈리아 중부의 한 바닷마을 절벽길을 끝없이 오르고 또 올랐다. 경사도 무지하게 가파라 버스는 속도도 내지 못했다. 

영어 방송 하나 없던 버스에서 기댈 곳은 사람 뿐이었다. 영어 한 마디 할 수 없는지 나폴리 지방 사람들은 수줍다. "Ravello?"라는 아시아 여자의 질문에 이탈리아의 여학생은 무뚝뚝하게 고개만 흔들었다. 

라벨로가 아니라는건지, 아님 말 걸지 말라는건지 알 수 없어 속수무책 앉아있었다. 유일하게 말붙여 보일만 한 여학생이 내리자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지나친거 아냐? 지도엔 이렇게 안멀었는데! 오늘 길바닥에서 자게 되는 건가?



아 그게 아니라, 라벨로는 저 버스의 종점이었다. 산 중턱이 아니라 산 꼭대기에 있는 마을. 

남은 승객이 우르르 내린 그곳이 라벨로였다. 버스는 정류장에 정차 하다 다음 정류장 시간에 맞춰 다시 비탈길로 내려가더라.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특이하게도 꽃향기가 났는데, 라일락이다...! 농담이 아니라 라일락 꽃향기가 얼마나 짙던지, 온 마을에 향수를 뿌려댄 듯 잔뜩 퍼져있었다.



겨우겨우 세이브한 B&B엔 짐만 던져놓고 다시 나왔다. 해가 지고 있었다. 저 옆에 바다와 얼마나 멀어졌는지만 봐도 이 곳의 높이를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포지타노보다도 공기가 맑고 쌀쌀하다. 



라벨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진



공연장 도착. 아직은 텅 비어서 과연 여기서 공연을 하는 게 맞는지도 의심됐지만. 



2017년 7월 6일 21시 라벨로콘서트시즌XXXII 공연. 가격은 27.5유로, 좌석은 D5. 

괜히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것들. 예매도 가능하다. www.ravelloarts.org . 하절기에 한달여에 걸쳐 하는 클래식 페스티벌은 다른 사이트니 주의!  



오늘의 연주자. 검은 곱슬머리를 하고 연미복을 입고 있던 남자는 조용히 무대 위로 올라와 연주를 시작했다. 달과 별의 움직임만 들리던 그날 밤. 피아노 선율이 어둠으로 흘러갔다.  



쉬는 시간. 밤 공기는 더욱 차가워져 있었다. 같은 날 아침 카프리에서 바싹 익어 열이 한창 올랐던 피부는 라벨로의 찬 공기에 어찌할 줄 몰라했다.



저녁도 먹지 못한 채로 밤 11시까지 공연을 본 상황. 공연장을 나오자 맥이 턱 하고 풀렸다. 너-무 피곤해 당장이라도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허기가 졌다. 이 도시에서 가장 넓다는(게 이정도인) 광장도 가로등 불에 겨우 의지하고 있었다. 광장 식당은 키친을 닫고 술 주문만 받았다. (얼마전 JTBC 비긴어게인이 여기서 공연을 했더라) 



불꺼진 상점엔 내 모습만 비친다.



기적적으로 열린 곳을 찾았다. 본의 아니게 이 동네 가장 맛집. 손님들이 늦은 시각까지 저녁을 끝내지 않아 문을 닫지 못하고 있었다.

간단한 디쉬는 가능하다고 했다. 사랑합니다! 어부리지라지만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로제소스와 모짜렐라 치즈(잔뜩!!!)로 버무린 뇨끼. 잊을 수 없다. 분명 다른 음식을 시켜도 맛있을거야. 여기 주인장인 '마마'는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손님들과 그렇게 얘기를 한다. 저 마마의 '너스레'로 이 집은 유명해지기도 했다. 나에게도 와서 맛이 괜찮냐고 다정히 물어봐준다. 네네네 어메이징해요. 



또 가려고 찍어놓은 영수증. 23시 13분에 라벨로에서 먹은 첫 끼. 아주 늦은 저녁. 가격도 착하죠. 저만큼의 뇨끼가 10유로. 

더 기억하고 싶은 트라토리아&피제리아 CUMPA COSIMO 



숙소로 가는 길엔 그간 공연한 아티스트를 만날 수 있다. 누군지 몰라도 아우라가 대단하다.



터널의 시작과 끝에선 언제나 라일락 향이 묻어나는 그런 도시.

여행 중 가장 좋았던 밤. 단 하루여서 더욱 간절했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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