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2019.06]시칠리아

프레드리히 황제가 잠든 팔레르모 대성당

Post truth 2020. 10. 10. 01:35

 

 

 

 


영화 <대부3>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했던 마씨모 극장과 함께 팔레르모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히는 팔레르모 대성당. 콰트로콴티에서 팔레르모 역을 등지고 서쪽으로 난 길을 걷다보면 이 근방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팔레르모 대성당에 다다른다. 여기서 더 나가면 포르타누오바와 노르딕 궁전이 나온다. 성당 건물은 무지하게 큰 데 부지 자체가 크지 않아서 그런지 다른 도시의 대성당만큼 압도적인 느낌을 주지 못했다. 조금 더 먼 발치에서 볼 수 있다면 건물의 아름다움이 도드라졌을텐데. 건물은 워낙 커서 어디에서 찍어도 화각 안에 한 번에 들어오지 않았다. 


 

 

 

 


측면과 달리 옆면은 이슬람 느낌 충만. 스페인 그라나다 궁전을 떠올렸다.


 

 

 

 


원근법이 좀 어색한 평면도. 사진으론 다 못 담았지만 실제 이렇게 생김. 

 


 

 

 

 


팔레르모 대성당은 그당시로 치면 신고전주의(네오클래식) 스타일의 건축물이다. 1185년 공사를 시작했지만 완공까지 600년이나 걸렸다. 짓는 동안 초기의 비잔틴 양식부터 아랍, 노르만, 바로크, 고딕 양식 등 다양한 건축양식이 더해져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대성당의 벽은 바로크 양식이고, 성당 정면은 고딕 양식을 띠는 식이다. 


 

 

 

 


처음으로 팔레르모에 갔을 땐 일정이 짧아 예배당만 간단히 둘러봤다. 이번엔 내부도 돌아보기로 했다. 옥상(성당 지붕)과 왕족 공동묘지, 성당 보물을 모아둔 박물관 등이 묶여 있는 패키지로 티켓 구입. 10유로. 눈에 띄는 광고도 있었다. 'VISTA SERALE'이라고 여름에는 일정 기간 동안 전망대를 야간에 개방한단다. 이때는 성 로잘리아(Saint Rosalie) 축제 기간이어서 거리마다 일루미네이션을 설치해 놨는데, 전망대에서 도시를 조망했다면 그것도 장관이었을 듯. 개방하는 날짜를 체크해봤다. 내가 머무는 시간과는 맞지 않았다. 


 

 

 

 

 


들어가자마자 볼 수 있는 건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데리코 2세(무려 프레드리히2세!!!!!)의 관. 현지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물이다. 페데리코2세가 이끈 13세기 시칠리아는 그들 역사의 하이라이트이기 때문이다. 시칠리아에선 중심지 입상, 중심지 지명이 페데리코로 지어진다. 다른 지역이 단테나 가르발디의 이름을 따온 것과는 다르다. 왕관을 쓴 무장(武裝) 차림에 매(Falcon)가 새겨져 있으면 페데리코다.

 

jmagazine.joins.com/monthly/view/326572

[유민호의 서양사 현장르포 | 승자의 조건, 패자의 교훈(7)] 섬 문명이 낳은 ‘최초의 근대인’ 페

성전(聖戰)의 땅에서 신사협정을 이끌어내다

jmagazine.joins.com

"페데리코는 생전에 수많은 타이틀을 지녔었다. 시칠리아 왕(재위기간 1198년~1250년)뿐 아니라 이탈리아 왕(1212년~1250년), 로마 왕(1212년~122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1220년~1250년), 그리고 예루살렘 왕(1225년~1228년)까지 맡은 13세기 유럽 최강의 군주였다. 시칠리아 인은 물론 역사학자 모두가 찬미하는 타이틀은 예루살렘 왕이다. 당대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더욱 갈채를 받는 역사이기도 하다." - 월간 중앙(2019.6.17)


 

프레드리히 2세

 

교황에 의해 3살에 왕위에 올라 바티칸 대신 일평생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 전쟁의 지휘관 역할을 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전쟁으로 점철된 혼돈의 시기에서도 라틴·독일·이탈리아·아랍어를 비롯한 9개 언어에 통달한 시대의 천재였다. 페데리코는 빼어난 지덕술로 자신만의 권위를 만들었고 이슬람 국가들의 폭넓은 지식에 기반해 가톨릭은 물론, 그리스정교·이슬람교·유대교의 통합을 이뤘다. 술탄과 평화적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에 무혈입성 했을만큼 외교술이 뛰어났지만 이슬람 문화에 열려있던 탓에 이단자로 찍혔다. 결국 교황을 상대로 전쟁에 나섰고 병환으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이후 프랑스 왕족 샤를 1세가 페데리코의 아들을 쫓아내고 시칠리아 왕위에 올라 페데리코 2세가 이루고자했던 이슬람과 카톨릭의 공존은 물거품이 됐다. 19세기 문화·문명사 연구의 권위자 부르크하르트는 ‘왕의 역사를 통틀어 최초로 등장한 근대인’이라며 르네상스형 군주로 그를 평가했다. 문화 부흥지인 로마나 피렌체보다도 200년 앞선 것이라고 한다.


 

 

왼쪽 앞에 있는 관이 페데리코 2세. 오른쪽 관은 하인리히 6세.

 

 


프리드리히2세의 석관이 방문객들에게 가장 잘 보이는 쪽에 위치해있다면 그의 아버지 하인리히 6세의 관은 그 바로 옆에 누워있다. 독일어로는 하인리히이고 이탈리아에선 엔리코(Enrico VI)로 부른다. 


 

 

 

 


프레드리히 2세 영접한 감동을 안고 옥상으로 올라간다.


 

 

 

 


두오모가 보이는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다.


 

 

 

 


빽빽하지만 일정하게 드러선 건물. 가까운 듯 먼 바다. 도시를 아우르는 메마른 돌산. 모든 게 한 눈에 들어온다. 대성당은 올드타운 한 중심이어서 신식 건물은 없다. 뉴타운을 나가도 밀라노에서 봤던 세련된 고층 건물은 없다. 


 

 

 

 


성당의 유물들을 모아놓은 박물관 


 

 

 

 


외관에서 봤던 둥근 기둥은 내부에서 보면 이런 모습이다. 이런 세밀화 너무너무너무너무 좋다...🤣


 

 

 

 

 


타일로 만든 모자이크와 반복적인 패턴. 역시 기쁘게 감상하는 것 중 하나.


 

 

 

 


노르만 왕족들의 지하 묘지. 박물관 조명을 켜놔서 망정이지. 한기가 돌아 소름 돋았다. 사람은 또 왜 이렇게 없어 ㅠ.ㅠ   


 

 

 

 


대리석으로 이렇게 생생히 조각해놨다. 이탈리아엔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들이 도대체 몇 명인지.  산 사람이 누워있는 것 같았다고😭  


 

 

 

 

 

 

 

 

 


예배당 내부. 지금은 이렇게 생겼지만 예전엔 저렇게 배치해 썼다고 한다.


 

 

 

 


실제 내부가 크긴 한데, 삽화만큼의 깊이는 아니다. 저 정도 깊이였으면 바티칸 대성당 뺨 칠 수 있음. 


 

 

 

 


대성당 바닥의 해시계가 눈에 띄었다.


 

 

 

 


교회 바닥에 대리석 모자이크로 별자리가 그려져 있는데, 여기에 일직선으로 해가 들어오면 12시라고 한다.


 

 

 

 


콰트로콴티로 돌아가는 길엔 이런 노상 카페가 이어져 있다. 그 뒤엔 아무도 살지 않는 듯 무너진 벽도 채우지 않은 허름한 집들이 보였다. 팔레르모에서, 아니 어쩌면 시칠리아에서 가장 의미있는 건축물일텐데도 이 섬 사람들은 저렇게 꾸밈없다.


 

728x90